인사팀이 "내년부터 호봉표를 없애고 직무등급별 기본급으로 갑니다"라는 슬라이드를 띄운 뒤, 회의실 뒤쪽에서 동의서 용지를 돌립니다. 15년차 직원은 남은 호봉 승급분이 사라지는 계산을 머릿속으로 하고, 3년차 직원은 성과급 상한이 올라간 표를 보며 바로 서명합니다. 회의가 끝나자 부서장이 "서명 안 한 사람만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 임금체계 개편 분쟁의 쟁점이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누가 불이익을 입는지, 동의를 어떤 방식으로 받았는지, 사용자가 어디까지 개입했는지입니다.
이 글은 호봉제를 직무급·성과급으로 바꾸는 임금체계 개편에 한정해 실제 절차를 밟는 순서대로 정리합니다. 어떤 개편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에 해당하는지 판단 기준을 보고, 근로자 과반수의 집단적 동의를 유효하게 받는 방법인 회의방식과 사용자 개입 배제 원칙을 다룹니다. 이어 누가 동의 주체가 되는지, 동의 없이 시행했을 때의 효력과 기존 근로자·신규 입사자의 적용 차이, 202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가 어디까지 남아 있는지를 차례로 설명합니다.
상담 사례
사례 ① 호봉 승급분이 사라진 15년차 생산직
상시 근로자 180명인 자동차 부품 제조사가 30호봉 체계를 4개 직무등급으로 통합했습니다. 15년차 생산직 A씨는 기본급 월 320만원이 당장은 유지되지만, 종전 호봉표대로라면 매년 붙던 승급분 월 8만원이 사라져 5년 뒤 기준으로 연 500만원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회사는 "지금 받는 돈이 줄지 않으니 불이익이 아니다"라며 설명회 직후 개별 서명만 받았습니다.
사례 ② 성과급 확대로 세대 간 유불리가 갈린 경우
직원 60명인 유통기업이 기본급 비중을 80%에서 65%로 낮추고 나머지를 직무급·성과급으로 돌렸습니다. 상위 평가를 받은 3년차 직원들은 연봉이 400만원가량 올랐지만, 근속 12년 이상 관리직 12명은 평균 연 300만원 줄었습니다. 회사는 60명 중 45명이 서명했으니 과반수 동의를 받았다고 봅니다.
결론부터 정리하면
- 당장 임금총액이 줄지 않아도 호봉 승급분처럼 규정상 예정된 장래 임금 상승분을 박탈하면 불이익변경으로 평가될 여지가 큽니다.
- 불이익변경에는 과반수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하며(근로기준법 제94조 제1항 단서), 위반 시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 규정됩니다(제114조 제1호).
- 동의는 회의방식에 의한 집단적 의사결정이어야 하고 사용자의 개입·간섭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서명부 회람만으로는 무효가 될 위험이 큽니다.
- 동의 주체는 사업장 전체 근로자가 아니라 변경되는 취업규칙의 적용을 받거나 장래 적용이 예상되는 근로자 집단입니다. 다만 하나의 임금체계 안에서 유·불리가 엇갈려 이해가 충돌한다면 그 체계가 적용되는 근로자 집단 전체가 동의 주체가 됩니다.
- 동의 없는 변경은 기존 근로자에게 효력이 없어 종전 취업규칙이 적용되지만, 변경 후 신규 입사자에게는 변경된 규정이 적용된다는 것이 판례입니다.
- 상시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취업규칙에 관한 규정(제93조~제97조)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근로계약에 정한 임금을 낮추려면 개별 동의가 별도로 필요합니다.
무엇이 '불이익'인지 가르는 기준
- 비교 대상 — 변경 전후의 취업규칙 문언을 비교합니다. 개별 근로자가 실제 얼마를 받았는지가 아니라 규정상 근로조건 저하 여부를 봅니다.
- 기득이익 박탈 — 이미 발생한 임금뿐 아니라 근속에 따라 확정적으로 예정되어 있던 승급·가산도 기득의 이익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 총액 유지의 함정 — 첫해 총액을 맞춰도 임금 결정 구조가 근속에서 직무·평가로 바뀌면 장기적으로 임금이 줄어드는 집단이 생깁니다.
- 애매하면 동의 절차 — 유리·불리가 섞였다면 불이익변경으로 보고 진행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사례 ①에서 회사는 "현재 급여가 유지되므로 불이익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호봉표에 따라 매년 붙던 승급분이 규정상 사라졌다면 근로조건이 저하된 것으로 볼 여지가 큽니다. 사례 ②처럼 기본급 비중을 낮추는 개편도 임금의 안정성을 떨어뜨려, 총액이 늘어난 직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불이익변경이 아니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과반수 동의를 유효하게 받는 방법
- 과반수 노조가 있는 경우 — 그 노동조합의 동의로 갈음됩니다. 조합원 총회 결의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며 노조 대표자의 동의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판례입니다.
- 과반수 노조가 없는 경우 —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이때 모수는 변경되는 취업규칙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 집단입니다. 임금체계 개편처럼 전 직원에게 적용되는 개편이라면 결과적으로 전체 근로자가 모수가 됩니다.
- 회의방식 — 전체 회합이 원칙이지만 규모가 커서 한자리에 모이기 어렵다면 기구별·부서별로 나누어 모이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다만 근로자들끼리 의견을 교환하고 찬반을 집약할 기회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 사용자 개입 배제 — 제도 설명과 자료 제공은 가능하지만, 설명 후 사용자 측이 퇴장하지 않고 관리자가 배석해 찬반을 종용하거나 미서명자를 파악해 압박하면 동의의 효력이 부정될 수 있습니다.
사례 ①처럼 설명회 직후 동의서를 돌려 개별 서명만 모으는 방식은 위험합니다. 판례는 근로자 상호 간 의견교환과 찬반 집약 절차를 생략한 채 개별 동의만 받거나 서명부를 회람한 경우 회의방식에 의한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서명이 과반수를 넘겨도 절차가 무너지면 개편이 무효가 될 수 있으므로, 회의 소집 공지와 설명자료, 회의록, 찬반 집계표를 남겨야 합니다.
누가 동의 주체가 되는가
- 기본 원칙 — 동의 주체는 사업장 전체 근로자가 아니라 변경된 취업규칙의 적용을 받거나 장래 적용이 예상되는 근로자 집단입니다.
- 하나의 임금체계라면 전체가 주체 — 근로조건 체계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고 유·불리가 엇갈려 근로자 간 이해가 충돌한다면, 전체적으로 불이익변경으로 보아 그 체계가 적용되는 근로자 집단 전체의 과반수 동의가 필요합니다. 젊은 직원에게 유리하고 장기근속자에게 불리한 개편이 전형입니다.
- 체계가 이원화된 경우 — 직군별로 임금체계가 분리되어 있고 변경된 규정이 다른 직군에 적용될 여지가 없다면, 불이익을 받는 그 집단만이 동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판례의 태도입니다.
- 장래 확대 가능성 — 지금은 특정 직급에만 적용되더라도 향후 확대가 예정되어 있거나 예상되는 구조라면, 확대 대상 집단까지 포함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사례 ②에서 60명 중 45명이 서명했다면 숫자상 과반수를 넘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줄어드는 관리직 12명에게 감액 규모와 산정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거나 부서별 회합 없이 서명만 받았다면 동의의 유효성이 다투어질 수 있습니다.
동의 없이 시행하면 어떻게 되는가
- 기존 근로자 — 변경은 효력이 없고 종전 취업규칙이 적용됩니다. 회사는 새 기준과 종전 기준의 임금 차액을 지급해야 할 수 있습니다.
- 신규 입사자 — 변경 후 입사자에게는 변경된 취업규칙이 적용된다는 것이 판례입니다. 한 사업장에 두 개의 임금 규정이 병존합니다.
- 임금채권 시효 — 소멸시효가 3년이어서(근로기준법 제49조) 몇 년 뒤 집단 소송으로 차액이 한꺼번에 청구될 수 있습니다.
- 사회통념상 합리성 — 대법원은 2023. 5. 11. 선고 2017다35588 전원합의체 판결로 종전 판례를 변경해 이 법리를 폐기하고, 그 자리에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를 제시했습니다. 근로자 측이 동의권을 남용했다고 볼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동의 없는 불이익변경은 무효입니다.
과거에는 내용이 합리적이면 동의 없이도 유효하다고 인정받을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기대로 절차를 건너뛰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위 전원합의체 판결은 사용자가 집단적 동의를 구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경우에는 변경의 효력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는 취지여서, 사례 ①의 회사가 개편안이 업계 표준이라고 주장해도 절차의 흠결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런 대응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 부서장에게 동의서를 걷어 오게 하고 미서명자 명단을 관리하는 방식 — 사용자 개입으로 평가되어 동의 전체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 "임금총액이 같으니 의견 청취만 하면 된다"며 동의 절차를 생략하는 방식 — 장래 기대이익의 박탈이 인정되면 절차 위반이 됩니다.
-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의 의결로 과반수 동의를 갈음하는 방식 — 원칙적으로 불이익변경 동의를 대체하지 못한다는 것이 판례의 태도입니다.
- 개편을 먼저 시행한 뒤 나중에 개별 동의서를 받아 보완하려는 방식 — 개별 동의는 집단적 동의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 취업규칙만 고치고 근로계약서·연봉계약서를 그대로 두는 방식 — 근로계약이 취업규칙보다 유리하면 근로계약이 우선한다는 것이 판례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개편 첫해 임금총액이 동일하면 불이익변경이 아닌가요?
첫해 총액 보전은 판단 요소 중 하나일 뿐입니다. 호봉 승급분처럼 규정상 예정되어 있던 장래 임금 상승분이 사라지면 기득이익의 박탈로 볼 수 있으므로, 총액 보전을 근거로 동의 절차를 생략하지 마십시오.
Q. 과반수 노조가 동의하면 조합원 총회까지 열어야 하나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판례는 노조의 동의 방식은 내부 절차에 따르면 되고 대표자의 동의로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규약이 총회 의결 사항으로 정하고 있다면 그 절차를 따르십시오.
Q. 동의는 전 직원에게 받아야 하나요, 불이익을 보는 직군만 받으면 되나요?
변경되는 규정의 적용을 받거나 장래 적용이 예상되는 근로자 집단이 기준입니다. 임금체계 개편처럼 하나의 체계를 전 직원에게 적용하면서 세대별로 유·불리가 갈리는 경우에는 전체 근로자 집단의 과반수 동의를 받아야 안전합니다. 직군별로 체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다른 직군에 적용될 여지가 없을 때만 해당 집단만으로 좁힐 수 있습니다.
Q. 이메일이나 전자결재로 받은 동의도 유효한가요?
전자적 방법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지만, 회합을 통한 설명과 근로자 상호 간 의견교환 기회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었는지가 관건입니다. 설명 없이 결재창만 띄워 클릭을 받는 방식은 요건 충족이 어렵습니다.
Q. 동의를 못 받으면 개편을 아예 할 수 없나요?
기존 근로자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다만 신규 입사자부터 새 체계를 적용하거나, 보전수당과 경과규정으로 불이익을 완화한 안을 다시 제시해 협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액 폭이 큰 집단의 부담을 단계적으로 나누는 설계가 재협의의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Q. 5인 미만 사업장도 이 절차를 지켜야 하나요?
취업규칙에 관한 근로기준법 규정(제93조~제97조)은 상시 5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되지 않고, 작성·신고 의무 자체도 상시 10명 이상 사업장에 부과됩니다. 다만 5인 미만이라도 근로계약서에 정한 임금을 낮추려면 근로자 개인의 동의가 필요하고, 임의로 만들어 운영해 온 사규가 근로계약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면 이를 불리하게 바꿀 때도 개별 동의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임금 지급과 근로조건 명시 의무는 사업장 규모와 무관하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체크리스트
- 개편안 확정 전 직급·근속별로 5년 이상 장기 시뮬레이션을 돌려 손해를 보는 집단과 규모를 파악합니다.
- 과반수 노동조합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다면 동의 주체가 되는 근로자 집단의 범위(적용 대상과 장래 적용이 예상되는 직군)와 그 인원을 확정합니다.
- 전체 또는 부서별 회합 일정을 문서로 공지하고 개편 전후 임금표를 개인별로 배포합니다.
- 설명 후 사용자 측은 퇴장하고, 근로자들끼리 의견을 교환할 시간을 보장합니다.
- 회의록·찬반 집계표를 남기고 미서명자를 개별 압박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부 지침을 둡니다.
- 불이익이 큰 집단에는 보전수당이나 경과규정을 설계해 절차의 정당성을 함께 높입니다.
- 동의 확보 후 취업규칙 변경 신고, 근로계약서·연봉계약서 정비, 사내 게시까지 마무리합니다.
임금체계 개편은 내용보다 절차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사회통념상 합리성이라는 우회로가 닫힌 지금, 회의방식에 의한 집단적 동의를 제대로 밟았는지가 개편의 유효성을 좌우합니다. 설계 단계부터 절차 일정과 증빙 계획을 함께 짜 두시기 바랍니다.
※ 이 글은 일반적인 노동법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개별 사안에 대한 전문적 자문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므로 공인노무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